安 泰 寺

안타이지

좌선용심기(坐禪用心記)
좌선 할 때에 지켜야 할 욧점들


좌선이란 심지(心地)를 밝히는 일이고, 자신의 본 성품 속에서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고, 근원을 나타내는 일이다.

좌선을 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다. 좌선은 않거나 눕는 모습과는 상관이 없다. 선도 악도 생각치 말고, 성인과 범부도 구별하지 말고, 번뇌와 깨달음조차도 분별하지 않는다. 좌선은 중생과 범부의 구분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놓아버려야 한다. 모든 관계도 버려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감각기관을 쉬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름도 모른다. 몸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마음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것에 관해서 생각하면 생각은 사라진다. 그것에 관해서 말을 하면 말도 사라진다. 바보같이 되고 멍청이같이 된다.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끝없이 높고 한없이 깊어서 스스로 고요하다. 천상천하에 온통 이 몸 뿐이다. .

이것은 비교할 수도 없다. 완벽하게 죽은 것이다. 눈은 밝게 뜨지만 어느 곳에도 서있지 않다. 티끌이 낄 곳이 어디 있으며 장애가 될 것이 무엇인가.

맑은 물에는 앞뒤가 없고, 허공에는 안과 밖이 없다. 완벽하게 맑아서 밝음만이 빛나고, 허공만이 생길 뿐이다. 마음의 대상도, 마음 자체도 존재할 곳이 없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여전히 이름도 없다. 삼조(三祖)께서 임시로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용수(龍樹) 존자께서 한때 몸이라고 부르셨다. 깨달은 핵심이고, 모든 부처의 몸을 만드는 것, 거기에는 더함도 덜함도 없다.

이것은 보름달로 비유된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는 것은 이 마음이다. 이 마음은 지금까지도 비추어왔고, 지금도 밝게 빛난다. 용수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의 삼매의 모습이라고 했지만, 이 마음은 모양도 없고, 상대도 없지만, 그러나 차별상은 뚜렷하다.

오직 마음 뿐이요, 오직 몸 뿐이다. 같으냐 다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몸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몸이 일어나면 구별이 된다. 하나의 파도가 일어나면 수천의 파도가 따라온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 수많은 생각이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엉켜지고, 사지(四肢)와 오감(五感)이 생겨나고, 36개의 신체요소가 생겨나고 12연기(緣起)가 따라서 일어난다. 일단 형성되기 시작하면 계속되는데, 역시 무수한 진리더미 위에 존재한다.

마음은 큰바다의 물과 같고, 몸은 파도와 같다. 물이 없으면 파도도 없고, 파도가 없으면 물도 없다. 물과 파도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움직임과 고요함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대오온으로 이루어진 신체가 소멸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왕래, 생사를 계속한다”고 한다. ."

이제 좌선은 불성의 바다로 직접 들어가서 부처의 몸을 드러내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마음은 이 현재의 순간에 드러나고 근원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 큰 바다의 물은 늘지도 줄지도 않고 파도도 그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하나의 큰 목표를 위해서 이 땅에 출현하셨다. 그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혜를 보여주고 지혜에 들게하기 위한 것이다.이것을 위한 조용하고 깨끗한 길이 있다. 그것은 좌선이다. 이것은 삼매이며, 그 속에서 모든 부처님들이 부처로서 스스로를 받는다. 이것은 삼매중의 으뜸이다. 그대가 잠시라도 이 삼매 속에 머문다면 마음자리는 곧 맑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불도에 이르는 진실된 문임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심지(心地)를 맑히고 싶다면 그대는 이런저런 지식들을 쉬어야 한다. 세간(世間) 일도 던져버리고 불법(佛法)도 던져버려야 한다. 모든 헛된 감정도 지워버려야 한다. 오로지 실제인 진실된 마음이 나타나면 망상의 구름은 개고, 마음의 달이 밝게 비친다.

부처님께서는 “듣고 생각하는 것은 문 밖에 있는 것과 같다. 좌선은 집에 돌아와서 평화롭게 앉아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진실된 말씀인가. 우리가 듣고 생각할 때에 여러 가지 생각은 쉴 수 없고, 마음은 여전히 들끓는다. 그래서 다른 활동은 문밖에 있는 것과 같다. 좌선만이 모든 것을 쉬게 하고, 자유롭게 흐르게 하여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 좌선은 집에 돌아와서 평화롭게 앉아있는 것과 같다.

다섯가지 장애의 번뇌는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부터 시작된다. 무명이란 것은 자기자신에 대해서 어둡다는 말이다. 여기에 좌선의 수행은 스스로를 비추는 것이다.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시키려면, 즉 근본무명을 제거시키려면, 좌선수행이 그 열쇠이다.

옛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망상이 멈추면 적정(寂靜)이 드러난다. 적정이 드러나면 지혜가 나타나고, 지혜가 나타나면 진리가 저절로 드러난다.”고 하셨다. 이 망상(妄想)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선과악에 대한 차별심을 없애야 한다. 모든 일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어느 곳에도 두지말며, 이일 저일에 끼어들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에 두어야 할 첫 번째 욧점이다. 망상의 대상이 사라지면 망상이 사라진다.

망상이 사라지면 변치않는 진리가 눈앞에 나타나고, 그대는 모든 것을 훤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기술이나 손재주, 의술, 점치고 운수 보는 일 들을 삼가야 한다.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이나 춤, 쓸데없는 논쟁, 명성이나 개인적 이득 따위를 멀리해야 한다. 시를 짓는 일도 마음을 정화하는 한가지 방법이지만, 거기에 빠져서는 안된다. 서예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도를 닦는 이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일들이다. 이것이 마음을 조화롭게 하는 필수조건이다.

사치스러운 옷을 입어서는 안되며 너무 더러운 옷을 입어서도 안된다. 사치스러운 옷은 탐욕을 일으키며,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도를 닦는 수행자에게는 장애물이다. 누가 그대에게 그런 것들을 주더라도 거절하는 것이 스승님들의 올바른 전통이다. 이미 받았다면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잃어 버렸다고 해도 찾으려 하거나 아까와 해서는 안된다. 낡고 더러운 옷은 빨고 꿰매야 한다. 입기 전에는 깨끗이 빨아야 한다. 옷이 깨끗하지 않으면 춥거나 병에 걸린다. 이것은 그대의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육체적 생존에 연연해서는 안되지만, 불충분한 의복이나 음식, 거처는 우리의 수행에 어려움을 준다.

살아있는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거친음식이나 상한음식을 먹어서도 안된다. 그러한 불결한 음식들은 위장을 상하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편히 앉아 있을 수 없다. 맛있는 음식에 빠져서도 안된다. 그런 음식들은 육체에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 그대가 탐심(貪心)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음식은 그저 육체를 유지할 정도로만 먹고 맛을 즐기면 안된다. 또한 음식을 먹은 후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병이 생긴다. 음식을 먹은 후에는 한동안 기다렸다가 앉아야 한다. 수행자는 먹는 것을 절제하고, 먹을 수 있는 양의 2/3정도만 먹어야 한다. 건강한 음식들, 깨, 고구마 등은 먹어도 된다. 그대는 심신(心身)을 잘 조화롭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좌선 중에 앉아있을 때에는 벽에 몸을 기대면 안된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나 높은 곳, 노출된 곳에 앉아서도 안된다.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가끔 몸이 춥거나 덥거나, 뻣뻣하거나 나른하거나, 무겁거나 가볍거나 혹은 아주 말똥말똥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감각은 마음과 호흡의 부조화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호흡을 조절해야 한다. 우선 잠시동안 입을 벌리고, 긴 숨은 길게 쉬고, 짧은 숨은 짧게 쇤다. 그리고 점점 숨결을 조화시킨다. 그리고 잠시동안 숨결을 따라간다. 정신이 들면 호흡은 자연히 조화롭게 된다. 그리고 호흡이 저절로 코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마음이 마치 가라앉거나 둥둥 뜨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혹은 날카롭거나 혹은 멍청하거나, 혹은 방밖이 보이거나, 몸안이 보이거나, 불보살님들의 모습이 보이거나 할 때도 있다. 혹은 때때로 지혜가 생겨서 경전이나 주석서가 저절로 전부 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상한 상태는 마음과 호흡이 조화롭지 못할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잘못들이다. 이런 병통들이 생길 때는 일어서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정신이 멍청해 지면, 그대의 마음을 머리카락 선(양 미간 사이로부터 위쪽 7센티메터)이나 혹은 양미간(두눈 사이)에 둔다. 정신이 산란해 지면 마음을 코 끝에 두거나 아랫배에 둔다. 평상시에 좌선을 할 때에는 마음을 왼손바닥에 둔다. 대개는 오랫동안 앉아있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요해 지며, 저저로 산란심이 없어진다. 또한 비록 옛 가르침은 마음을 비추는 전통적인 방법이지만, 너무 많이 읽거나 쓰거나 들으면 안된다. 그것은 마음을 산란시킨다. 흔히 심신을 지치게 하면 병이 온다

화재나, 홍수나, 바람이 심한 곳, 도적이 있는 곳에는 앉으면 안된다. 바닷가, 술집, 윤락가, 과부나 처녀가 있는 곳, 혹은 가무가 있는 곳은 피해야 한다. 또 왕이나 대신, 부자 권력자 가까이에 머물지 말며, 욕심이 많은 이, 명예를 쫓는 이, 자기 주장이 많은 이를 피해야 한다.

비록 큰 불교의식이나 대사찰의 전각은 훌륭하지만, 좌선에 열중하는 이는 그런 일에 개입하면 안된다. 설법을 너무 즐겨서도 안된다. 마음을 산란시키기 때문이다.

대회중(大會衆)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기뻐해서도 안된다. 너무 여러 가지를 수행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운 곳,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운 곳도 좋지 않다. 심심해서 재미를 찾는 사람들과 가까이 해서도 안된다. 훌륭한 스승과 도반 수행자가 있는 선원(禪院)이나 깊은 산중이나 골짜기에 머물러야 한다. 행선(walking meditation, 行禪)을 하기에 좋은 곳은 맑은 물이나 푸른 산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적당한 곳은 개울가나 나무 밑이다. 무상(無常)을 관(觀)하고 항상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도(道)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방석은 충분히 편히 앉을만큼 두껍게 깔아야 한다. 수행하는 장소는 깨끗해야 한다. 항상 향을 피우고, 수호신장(守護神將)과 부처님와 보살님들에게 꽃을 공양해야 한다. 이들은 그대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호한다. 불보살님이나 아라한의 불상을 모시면 마귀가 그대를 해칠 수 없다.

항상 자비심을 잃지 말며, 모든 중생에 대해서 한없는 보시를 베풀어야 한다. 성을 내면 안되고, 자만해서도 안되며 불법을 좀 안다고 우쭐대서도 안된다. 성을 내는 것은 외도들이나 무지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모든 망상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서원을 세워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앉아있어야 한다. 이것이 좌선수행의 요체(要諦)이다. 항상 눈과 발을 씻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고요히 하고, 처신을 적절히 해야한다. 세속적인 감상을 던져 버리고 수도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다른 이의 법에 시기심을 내어서도 안되지만, 요청 받지 않은 일에 법을 설해서도 안된다. 설령 누가 묻는다고 해도 세 번 침묵 해야 한다. 그래도 그이가 진심으로 묻는다면 그때 말해 주어야 한다. 말하고 싶을 때가 열 번이라도 그 중 아홉 번은 침묵해야 한다. 입안에 이끼가(곰팡이가) 끼듯이 해야 한다. 겨울에 쓰지 않는 부채처럼, 바람의 방향에는 무관심한, 공중에 내걸린 풍경처럼, 그렇게 무관심해야 한다. 불법을 남을 이용하는데 쓰지말고, 불도를 자신을 뽐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말라. 이를 가장 명심해야 한다. .

좌선은 가르침과 수행과 깨달음 이 셋 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모두 좌선 속에 들어있다. 깨달음의 판별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데에 근거하겠지만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행은 적극적 실천이지만,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르침이란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함이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르침은 선(禪)속에서 발견되지만, 일반적인 가르침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직접 가리킴이다. 오직 도를 표현할 뿐이요, 온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문장이 아니다. 견해가 끊어지고, 개념이 바닥났을 때에 한 마디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것이 부처와 조사의 참 가르침이다. .

비록 우리가 수행을 말하지만,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말하자면, 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입은 침묵하고, 마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여섯가지 감각은 스스로 분명하고 물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문(聲問, 소승의 수행자들)들의 16단계 수행이 아니다. 또 이것은 홀로 수행하는 독각승(獨覺僧)들의 12연기에 대한 이해를 위한 수행도 아니다. 또한 이것은 만행(萬行)을 수행하는 보살(菩薩)들의 육바라밀도 아니다. 이것은 애써서 되는 일이 아니고, 그래서 깨달음이다. 다만 삼매 속에서 쉴 뿐이다. 그 속에서 그저 자기 자신이 부처로서 자기 자신을 받아서 쓴다(삼매). 그저 네가지 평화수행과 열려진 기쁨 속에서 노닐 뿐이다. 이것이 부처와 보살의 깊은 수행이다.

비록 우리가 현성(現成)을 이야기하지만, 이 현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최상의 삼매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생(不生), 무장애(無障碍), 자성각(自惺覺, 스스로 일어나는 자각)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은 밝음을 향한 문이고, 부처의 각성을 향한 것이고, 커다란 안심(安心)의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성속(聖俗)과 미오(迷悟)의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본성에 근거하는 최상의 깨달음을 구현하는 것이다.

좌선은 또한 수련(discipline)과 수행(practice)과 지혜(wisdom) 이 셋 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모두 좌선 속에 들어있다.

수련은 흔히 나쁜 행동을 그치고 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좌선에서는 모든 것은 불이(不二)이다. 둘이 아니다. 끝없는 관심을 던져 버리고, 부처의길과 세속의길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 그대의 일상적인 정서는 물론, 수행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상대적이 개념들을 놓아버릴 때 무엇이 그대에게 장애가 되는가. 이것이 형체없는 수련이다.

수행은 흔히 끊이지 않는 정신집중을 말한다. 좌선은 혼란과 이해를 따지지 말고, 심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으며, 망상이 없으며, 바보같이, 태산같이 대해(大海)같이 유지해야 한다. 동정(動靜)의 자취도 없다. 이 수행은 수행 없음이다. 왜냐하면 수행할 대상도 없으므로 큰 수행이라고 한다..

지혜는 흔히 맑은 분별심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좌선에서는 모든 지식은 스스로 사라진다. 마음과 차별심은 영원히 잊혀진다. 지혜의 눈은 차별이 없지만, 깨달음의 정수를 밝게 알고있다. 처음부터 그것은 혼란이 없고, 개념이 없고, 사방에 퍼져있는 맑고 밝음이다. 이 지혜는 지혜 없음이다. 왜냐하면 흔적이 없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지혜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평생에 가르치신 가르침은 바로 이 수련, 수행, 지혜이다. 좌선에서는 유지되지 않는 수련, 실천되지 않는 수행, 깨달음이 없는 지혜는 없다. 좌선은 혼란의 악마를 정복하고, 도를 얻어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이 힘에 의해서 흔적 없음으로 돌아온다. 이 초능력적인 힘, 찬란한 빛, 심오한 가르침, 이 모든 것들이 좌선 속에 있다. 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좌선이다.

앉는 것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을 찾아서 두꺼운 방석을 놓는다. 바람이나. 연기, 비, 이슬 등이 들어오지 않도록 한다. 청결한 장소를 찾아서, 충분한 자리를 잡는다. 예전에는 금강보좌나 돌 위에 앉기도 했다. 앉는 자리는 낮에 너무 밝거나 밤에 너무 어두우면 안된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야 한다.

마음과 지식과 의식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기억과 생각을 내려놓고, 관찰만 계속한다. 부처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을 짓지 말아야 한다. 얼마나 잘, 혹은 얼마나 잘못 하고있는지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머리 위에 불을 끄는 일이 화급한 것처럼 시간을 아껴야 한다.

부처님은 똑바로 앉아 계셨고, 보리달마는 면벽을 하였다. 두분 모두 전심전력을 다 하셨다. 세키소 선사(石霜楚円)는 낡은 고목과 같았다. 중국 송나라때의 천동여정(天童如淨)선사는 조는 것을 경계하고, “그저 앉아있는 일만이 그대가 할 일이다. 향을 피울 필요도 없고, 참회하고, 경을 배우거나, 염불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

앉아 있을 때는 가사를 입고 (일상생활이 끝나지 않은 처음과 끝 시간을 제외하고는),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 방석은 30센티메터로 두꺼워야 하며, 둘레는 90센티메터쯤 되는 것이 좋다. 정강이 모두를 방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고, 엉덩이와 정강이 윗 부분만 방석 위에 올려 놓는다. 이것이 부처나 조사가 앉는 방법이다. 다리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한다. 결가부좌를 할 때에는 오른 발을 왼쪽 장딴지 위에 올려놓고, 왼쪽 발은 오른 장딴지 위에 올려놓는다. 의복과 가사는 꼭 조이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오른 손을 왼발 위에 올려놓는다. 엄지손가랄 끝은 살짝 붙인다. 두손을 이렇게 하여 몸에 가까이 둔다. 그러면 엄지손가락은 배꼽 부위에 위치하게 된다. 등을 똑바로 세우고 앉는다.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한다. 코는 배꼽에 일치시킨다. 그리고 혀는 입천장에 위치시킨다. 숨은 코로 쉬는 것이다. 입술을 다문다. 눈은 뜨는데, 너무 크게 뜨거나 너무 작게 떠서는 안된다. 몸과 마음을 안착시키고 숨을 크게 한두번 들이마셔 뱉는다. 고요히 앉아있으면서 상체를 일곱 여덟 번 가만히 흔들어 안정시키고 똑바로 앉아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 .

이제 무상(無想,생각 없음)에 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무상을 생각하는가? 그것은 생각 너머의 생각이다. 이것이 좌선의 정수이다. 장애를 쳐부수고 깨어있음을 유지해야 한다.

적정의 상태에서 일어나고자 하면 손을 무릎에 놓고 일곱 여덟차례 몸을 흔든다. 숨을 입으로 크게 쉬고, 손으로 마루를 짚고서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천히 걷고 오른편, 왼편으로 돈다.

졸음이 오거나 멍해질 때에는 몸을 흔들고 눈을 크게 뜨거나 혹은 관심을 머리털 끝이나 눈썹에 집중한다. 그래도 졸리면 눈이나 몸을 비빈다. 그래도 잠이 깨지 않으면 일어나서 걷는데, 시계 방향으로 걷는다. 일단 백걸음쯤 걸으면 졸음이 달아날 것이다. 걷는 방법으로는 한번의 숨에 반보 쯤 걷는 것이다. 이것은 걷지 않고 걷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걷는 것이다.

포행을 해도 정신이 나지 않으면, 찬물에 세수를 해야 한다. 혹은 보살의 삼취정계를 외워야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하며 잠에 빠져서는 안된다. 생사를 끊는 일대사와 무상의 신속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도(道)에 대한 눈이 아직도 어두운데 어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혼침(昏沈)이 계속되면 “오래된 악습이 뿌리깊이 박혀서 혼침에 쌓여 있구나. 언제나 사라지련가. 부처와 조사의 자비심으로 이 어둠을 건져주소서” 라고 외워야 한다."

만일 마음이 오락가락 하는 도거 상태가 되면 관심을 코 끝에 모으고 들숨과 날숨을 센다. 그래도 마음이 산란하면 경구를 외우고 정신을 차린다. 예를 들어서, “이놈이 무엇인가”, 혹은 “한 생각도 나타나지 아니할 때에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 - 수미산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 뜰앞에 잣나무니라“ 등이다. 이렇게 어떤 논리나 사변이 붙지 못하는 말들이 적당하다.

만일 그래도 산란심이 가라앉지 않으면 호흡이 끝나는 곳을 관(觀)하고, “태어나기 전 모습이 어떠한가”, “한 생각도 붙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한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치가 나타나면 산람심이 가라앉을 것이다..

고요함에서 일어나고자 한다면 서두르면 안된다. 순간이 공안(公案)이다. 수행과 깨달음이 분명하다면 공안은 현전하는 것이다. 어떤 흔적이 드러나기 전에 나타나는 것과, 시간이 파괴되는 저편의 모습과, 모든 부처와 조사의 행위는 모두 이 한가지이다.

그대는 그저 앉아서 그쳐야 한다. 침잠하고, 이 순간에 셀 수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 차가운 재처럼, 마른 고목처럼 되어야 한다. 버려진 사찰의 향꽂이처럼 되고, 흰 누더기 조각처럼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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